11편: 고조선 멸망 이후의 한사군 설치와 한반도 토착 세력의 저항

 

11편: 고조선 멸망 이후의 한사군 설치와 한반도 토착 세력의 저항


[1] 왕검성은 무너졌지만, 역사는 멈추지 않았다

기원전 108년 여름, 내부의 비극적인 분열로 인해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함락되었습니다. 찬란했던 한반도 최초의 국가는 그렇게 지도 위에서 사라졌고, 백성들은 나라 잃은 유민이 되어 거대한 슬픔에 잠겼습니다. 승리감에 도취한 한나라의 한 무제는 고조선이 누리던 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광활한 영토를 제국의 영토로 편입하고, 이를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거대한 행정 구역을 설치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 시간에 자주 들어보았던 '한사군(漢四郡)'입니다.

처음 역사를 배울 때 많은 이들이 이 대목에서 깊은 좌절감을 느끼곤 합니다. "우리 역사의 시작점인 고조선이 결국 중국 제국의 직할령이 되어 식민지로 전락했구나"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저 역시 예전에는 이 시기를 우리 고대사에서 지우고 싶은 암흑기로만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한나라가 남긴 기록과 당대 주민들의 움직임을 고고학적으로 정밀하게 추적해보면, 한사군의 설치는 완벽한 지배의 시작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고조선의 굳건한 토착 세력들과 유민들이 제국의 압제에 맞서 하루도 쉬지 않고 피 흘려 싸운 '거대한 저항의 서막'이었습니다.


[2] 한사군의 실체: 낙랑, 임둔, 진번, 현도

한나라는 고조선의 옛 땅에 낙랑군(樂浪郡), 임둔군(臨屯郡), 진번군(真番郡), 현도군(玄菟郡)이라는 4개의 군을 설치했습니다. 이 행정 구역들의 성격과 지리적 위치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이 시기 역사를 바라보는 첫걸음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기지는 평안도 일대에 설치된 '낙랑군'이었습니다. 낙랑군은 과거 고조선의 중심지였던 만큼, 한나라가 가장 공을 들여 세운 행정과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요동과 만주 국경 지대에는 '현도군'이 설치되어 북방 유목 민족과 고조선 유민들의 연결을 차단하는 방패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한반도 동북부(함경도 일대)에는 '임둔군'이, 한반도 중서부(황해도 및 한강 이북 일대)에는 '진번군'이 각각 자리 잡았습니다.

한나라의 계획은 명확했습니다. 이 4개의 거점을 통해 고조선이 누리던 중계 무역의 이익을 제국이 통째로 흡수하고, 동방의 토착 세력들을 철저히 분열시켜 다시는 강력한 통합 국가가 나오지 못하도록 짓밟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한나라는 4편에서 다루었던 고조선의 평화로운 사회 규범인 '8조법'을 폐지하고, 자신들의 가혹한 제국 법률을 이식하기 시작했습니다.


[3] 가혹한 억압이 불러온 부작용: 8조법에서 60여 조로

나라를 빼앗긴 고조선의 유민들에게 한나라의 통치는 재앙과 같았습니다. 한나라는 백성들을 감시하고 세금을 뜯어내기 위해 수많은 법조항을 들이밀었습니다. 중국의 역사서인 [한서] 지리지에는 "고조선이 망하고 범죄를 다스리는 법 조항이 8개에서 60여 조로 늘어났다"고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법이 수배로 늘어났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불안정해졌고, 백성들의 일상적인 삶이 범죄로 몰려 억압받았음을 뜻합니다. 사유재산을 빼앗기고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던 유민들은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농기구를 버리고 칼과 활을 쥔 유민들이 산속으로 들어가 저항군(의병)을 조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밤마다 한나라 관청을 습격하여 관리를 처단하고, 세금으로 빼앗긴 곡식을 빼앗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끊이지 않는 기습과 게릴라전 앞에 한나라가 파견한 태수와 군인들은 왕검성 바깥으로 마음대로 걸어 나가지 못할 정도로 극심한 공포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4] 토착 세력의 끈질긴 저항과 한사군의 붕괴

고조선 유민들의 결사적인 저항과 토착 세력의 압박은 한나라의 행정 시스템을 뿌리째 흔들었습니다. 제국군이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저항 세력을 막아내기에는 한반도의 지형이 너무나 험준했고, 백성들의 적개심은 너무나 깊었습니다.

결국 한사군은 설치된 지 채 30년도 지나지 않아 도미노처럼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기원전 82년, 한나라는 토착 세력의 거센 반발을 버티지 못하고 임둔군과 진번군을 공식적으로 폐지했습니다. 두 군은 낙랑군에 강제로 흡수 통합되었습니다. 북방의 현도군 역시 고구려의 모태가 되는 토착 세력들의 끊임없는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원래 설치되었던 압록강 유역에서 저 멀리 요동 서쪽으로 쫓겨나듯 중심지를 옮겨야 했습니다.

마지막까지 버틴 낙랑군 역시 본국의 통치력이 미치는 거대한 영토가 아니라, 토착 세력들의 거대한 바다 한가운데 고립된 외로운 섬에 불과했습니다. 고조선은 비록 지도자들의 배신으로 왕검성을 내주었지만, 그 땅에 살던 백성들은 제국의 지배를 온몸으로 거부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외세를 밀어내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의 치열한 투쟁은 결코 부끄러운 식민지의 역사가 아닙니다. 낡은 껍데기를 깨뜨리고, 훗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라는 더 강력하고 찬란한 고대 국가들을 탄생시키는 거대한 에너지를 응축하던 위대한 저항의 시대였습니다.


[핵심 요약]

  • 고조선 멸망 후 한나라는 영토 지배와 경제적 이권 독점을 위해 낙랑, 임둔, 진번, 현도의 한사군을 설치했습니다.

  • 한나라의 가혹한 지배와 법률 과잉(8조법에서 60여 조로 증가)은 고조선 유민들의 강렬한 분노와 조직적인 게릴라 저항을 유발했습니다.

  • 토착 세력들의 끈질긴 군사적 압박으로 인해 임둔과 진번은 설치 20여 년 만에 폐지되었고, 현도 역시 요동 방면으로 퇴각하며 한사군은 빠르게 와해되었습니다.


[다음 편 예고]

한사군의 행정 체계가 무너지고 제국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고조선의 영토 전역에서는 수많은 유민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대이동을 시작합니다. 다음 편에서는 고조선의 유민들이 어디로 이동하여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그리고 이 대이동이 삼국시대 형성의 거대한 밑거름이 된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추적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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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8조법이 한나라 지배 이후 60여 조로 늘어났다는 기록을 통해 당시 백성들이 느꼈을 압박감이 상상이 가시나요? 외세의 지배에 굴하지 않은 우리 선조들의 저항 정신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을 댓글로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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